대각국사 의천대사는 1055년 고려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 사이에서 넷째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義天)이며,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입니다.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인 문종이 여러 형제를 불러서 누가 출가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어린 후가 원하여 1065년 경덕국사를 은사로 하여 왕궁에서 출가하였습니다. 영통사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에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스승이었던 경덕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는데, 이 강의가 매우 훌륭하여 명성이 온 나라에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의천대사는 송나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의천대사의 안위를 염려한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085년, 마침내
의천대사는 왕과 어머님께 편지를 남기고 유학을 단행하였습니다. 이후 송나라에서 의천대사는 다양한 불교철학을 배우고 이에
대해서 토론하며 많은 종파의 많은 학승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천태산에서 본국에 돌아가면
천태교학을 널리 선양하겠다는 서원을 한 의천대사는 어머니인 모후의 뜻을 받들어 1086년 귀국하였습니다. 의천대사는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왕과 태후에게 허락 없이 외국에 간 죄를 빌었으나, 왕실에서는 대사를 성대히 환영하였습니다.
대각국사는 귀국할 때 불교서적을 3000여 권 가지고 와서 송나라의 모든 불교학을 섭렵하고, 천태학을
조직하였습니다. 한편 제자들을 양성하고 송나라에 있을 때 사귄 벗들과 교류하여 더욱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흥왕사의 주지로 있을 때에는 경율론 삼장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최초의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편집하였습니다. 이후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거하여 ‘고려속장’을 간행하였습니다.
1097년 국청사가 완성되자 대각국사는 첫 번째 주지스님이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모여드는
사람들이 무려 천여 명이 넘었다. 이때 한국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천태종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각국사는 그해
8월에 병이 나서 1101년 47세에 입적하십니다.
대각국사는 한국불교의 진흥과 발전에 공헌한 바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태종의 개립은 교단을 넘어 국가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교종과 선종이 대립함으로써 종파가 서로 대립과 투쟁하여 불교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대각국사는 고려불교의 혼란함을 바로잡아 올바른
사상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바른 전통을 세우고자 천태종을 개창하였습니다. 선학과 교학을 융화시켜 분쟁을 화합하고,
모든 철학과 신앙, 교학을 귀일하여 불교의 통일을 기하였던 것입니다.
의천대사는 300여권은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에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圓宗文類), 석원사림(釋苑詞林) 의 잔편,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의 서문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